교회의 활동 중 가장 왜곡된 것 중 하나는 선교이다. 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다양한 일들이 선교의 이름으로 행해져왔고,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더라도 여러가지의 모습이 선교의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되기에, 선교의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일반화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날 한국의 주류 교회들이 추구하고 있는 선교의 모습이 예수님이 말한 선교가 아님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선교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였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이사야서에서 찾아 읽으셨던 말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눅4:18-19)
예수님이 생각한 기쁜 소식, 즉 복음은,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 이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사야서의 말씀을 실천하셨다. 예수님이 단지 “마음이 억눌린 사람, 마음이 눈먼 사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그가 “세리와 창녀와 기타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신앙심이 의심받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당시 종교인들이 더러워서 상종도 않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런 실천 자체가 그들에게는 곧 해방의 복된 소식, 우리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선교이고 예수님이 교회에 기대하는 선교의 근본 모습인 것이다.
예수의 선교는 바리새인들의 선교와 구별된다. 바리새인들도 선교에 대해 열정적이었는데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마 23:15)
즉 바리새인의 선교는, 개종자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주입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복제하고 재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할 뿐, 전도대상자들의 삶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들을 위로하는 일에는 관심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선교를 보고 분개하여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바리새인들이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다는 사실은 예수님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고난받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여정이어야 할 선교가 내 신앙의 일방적 전파로 전락한 것을 예수님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안타깝지만 오늘날 교회의 선교는 예수의 선교보다는 바리새인의 선교를 더 많이 닮아있다. 단지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교회의 선교는 기독교의 틀 안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편입시키는 것을 절대적 목표로 한다. 세상 속에서 고통받고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하고, 그러기 위해서 내 삶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고민하기보다는, 자신만이 가장 완벽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도 그 신앙을 똑같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가장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그러기에 선교는 사랑과 포용의 모습보다는 적대적인 모습을 띄게 되고, 영적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이슬람과 대중문화 등 타자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이 선교에 충실한 자세인 것처럼 인식된다. 물론 우리는 그 배타성을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이라고 해명하지만, 이것이 허세라는 것은 예수의 선교가 어떠했던가를 돌아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은 소위 죄인이라고 불리던 세리와 창녀와 이방인들에 대해 한번도 배타적 태도를 취한 적이 없으며, 누군가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면 그것은 도리어 열정적인 선교로 땅끝까지 가기를 마다 않았던 바리새인들에게였던 것이다.
비록 오늘의 복음주의 선교가 맹목적 포교에서 벗어나 선교현지의 물질적 사회적 어려움까지도 돌아보는 “착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 근본적인 바탕은 아직 예수의 선교와 거리가 멀다. 교회가 선호하는 선교의 모습은 교회의 문을 나서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적절히 거리를 둔 채 오히려 선교를 통해 교회의 틀을 더욱 든든히 다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단기선교를 통해 도전을 받고 교회로 돌아오는 것은 권해도,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힘이 되어줄 생각은 않는다. 그러기에 교회는 헐벗고 불쌍한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눈물을 유도하기는 해도, 대형화된 교회의 풍요한 삶이 그들의 고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고민하지는 말라고 한다. 그러기에 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을 감동스럽게 끌어안으면서도, 자기가 정죄하는 성소수자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미안함도 마음에 품지 않는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은 모순된 우리 신앙의 근본을 뒤집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교회는 그러한 섬김보다는 먼 곳에 선교의 손길을 내미는 것을 선호한다. 그럼으로써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헌신과 연대가 없이도 얼마든지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며 자신을 정당화한다. 이렇게 활용되는 선교는 더 이상 복음의 전파가 아니다. 단지 교회를 위한, 또 하나의 교회의 프로그램일 따름이다.
우리가 섬겨야 할 이들을 찾아 교회 문 밖을 나서는 행위로서의 선교는 교회의 희망이다. 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나눔과 연대로 거듭나기 위한 가능성이 거기에 들어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선교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벗어나, 예수의 선교, 하나님의 선교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선교가 교회의 프로그램으로 활용되어서는 안된다. 선교가 우리의 신앙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도 안된다. 예수의 선교가 그랬던 것처럼,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린 이들의 삶과 그들의 이야기가 그 중앙에 놓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