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밖의 선교

우리는 교회 밖으로 나가서 선교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교회의 문화를 세상에 이식하는 선교는 교회의 내부 활동의 연장일 뿐이다.

선교란 우리의 교회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 그 교회를 세상에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다. 선교란 열린 마음으로 교회를 벗어나 세상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교회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발견하는 세상의 교회들은 기독교라는 종교적 형식을 입고 있지 않을 것이다. 대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가 상상 못했던 방법으로 세상 속의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들 속에서 고통받는 예수의 모습을 본받음으로써 세상의 교회에서 예배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스스로 당신이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셨던 거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한 가운데 서는 것이 참된 선교의 모습일 것이다.

왜 우리는 선교를 교회 문화의 틀 안에 놓기를 고집하는가? 혹시 선교라는 이름 하에 우리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우리의 믿음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신앙, 우리의 감동, 우리의 세계관을 세상 속에 이식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하나님이 명하신 선교가 아니다. 우월감과 자기의과 배타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그러한 노력들은, 오히려 더 높은 교회의 벽을 쌓을 뿐이다. 교회에 관한 우리의 모든 관념을 버리고 교회의 틀을 넘어서는 것이 선교를 위한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아니 선교라는 이름 자체를 내려놓는 것이 더 우선이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르시스의 교회 3

교회의 선교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이 되지 않을까 한다.

“우린 완벽해. 우리의 유일한 문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거야. 그러므로 저 사람들을 다 우리와 똑같이 만들어야  해. 우리처럼 완벽하게 되는 게 왜 싫다는 거지?”

이 말이 얼마나 오만하게 들리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교회 뿐이다.

교회는 스스로가 완벽하다고 여기기에 세상으로부터 배울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 속에서 할 일은, 나누어주고, 가르쳐주고, 일깨워주고, 도와주는 일 뿐이다. 따라서 선교는 일방적인 베풂으로 정의된다. 고통받고 소외된 이웃을 바라보면서, 그들로부터 배우고,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고, 그로 인해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굳이 그들로부터 배우는 점이 있다면, “저렇게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도 있는데, 내 삶에 대해 더 감사해야겠구나”하는 동정심 어린 깨달음, 굳이 내가 변화되는 것이 있다면 선교현장을 체험함으로써 나의 신앙과 믿음이 더욱 깊어지는 정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의 연대가 내 삶의 좀 더 근본적인 변화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선교의 언어에 끼어들지 못한다.

교회는, 내가 저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나의 믿음, 나의 생각, 나의 삶의 방식이 잘못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다. 이것은 유난히 왜곡된 오늘의 교회에 있어서는 특히 심각한 문제다. 성장제일주의와 세속주의와 자본의 숭배로 인해 부와 풍요의 시장이 되어버린 오늘의 교회,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배타성으로 많은 이들을 소외시키고 상처입히는 오늘의 교회, 그럼으로써 오히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의 진원지 역할을 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 그러한 교회가 자기 모습에 대한 아무런 반성과 성찰 없이 당당히 자신의 모습을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할 이상으로 제시하는 것은, 어리석음을 넘어 위험한 일이기까지 하다. 선교라는 이름 아래 그 많은 과오들을 도리어 합리화하고 미화하는 사악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의 아픔을 바라보며, 자신의 그릇된 신앙이 어떻게 많은 이들에게 고통과 소외와 눈물을 주었는지를 가슴아파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그 신앙의 모습을 바로잡을 수 있을지 배워야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 변화되고자 하는 결단과 겸손함이 없이 이루어지는 선교는, 개종자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땅 끝까지 가기를 마다 않았던 바리새인들의 선교와 다를 바 없다. 교회가 스스로 그 배타성과 오만함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이름과 구원의 복음을 말할지라도, 결국 우리의 이름, 우리의 문화, 우리의 생각을 전하고 강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 완벽하다 여기는 나르시스의 모습을 버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이야기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겸손히, 기꺼이, 배워야 한다.

교회/나눔에 관한 12 단상 (8): 선교

교회의 활동 중 가장 왜곡된 것 중 하나는 선교이다. 교회의 역사를 통틀어 다양한 일들이 선교의 이름으로 행해져왔고, 오늘의 한국교회를 보더라도 여러가지의 모습이 선교의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되기에, 선교의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일반화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날 한국의 주류 교회들이 추구하고 있는 선교의 모습이 예수님이 말한 선교가 아님은 분명하다.

예수님은 선교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였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며 이사야서에서 찾아 읽으셨던 말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4:18-19)

예수님이 생각한 기쁜 소식, 즉 복음은,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되고 버림받은 자들을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 이와 같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사야서의 말씀을 실천하셨다. 예수님이 단지 “마음이 억눌린 사람, 마음이 눈먼 사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그가 “세리와 창녀와 기타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는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신앙심이 의심받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당시 종교인들이 더러워서 상종도 않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런 실천 자체가 그들에게는 곧 해방의 복된 소식, 우리와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선교이고 예수님이 교회에 기대하는 선교의 근본 모습인 것이다.

예수의 선교는 바리새인들의 선교와 구별된다. 바리새인들도 선교에 대해 열정적이었는데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23:15)

즉 바리새인의 선교는, 개종자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주입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복제하고 재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할 뿐, 전도대상자들의 삶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그들을 위로하는 일에는 관심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선교를 보고 분개하여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바리새인들이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녔다는 사실은 예수님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고난받고 소외된 이웃과 함께 하는 여정이어야 할 선교가 내 신앙의 일방적 전파로 전락한 것을 예수님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안타깝지만 오늘날 교회의 선교는 예수의 선교보다는 바리새인의 선교를 더 많이 닮아있다. 단지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교회의 선교는 기독교의 틀 안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편입시키는 것을 절대적 목표로 한다. 세상 속에서 고통받고 억압받는 이들과 함께 하고, 그러기 위해서 내 삶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지 고민하기보다는, 자신만이 가장 완벽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도 그 신앙을 똑같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가장 궁극적인 목표인 것이다. 그러기에 선교는 사랑과 포용의 모습보다는 적대적인 모습을 띄게 되고, 영적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이슬람과 대중문화 등 타자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이 선교에 충실한 자세인 것처럼 인식된다. 물론 우리는 그 배타성을 “하나님을 모르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의 마음”이라고 해명하지만, 이것이 허세라는 것은 예수의 선교가 어떠했던가를 돌아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은 소위 죄인이라고 불리던 세리와 창녀와 이방인들에 대해 한번도 배타적 태도를 취한 적이 없으며, 누군가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면 그것은 도리어 열정적인 선교로 땅끝까지 가기를 마다 않았던 바리새인들에게였던 것이다.

비록 오늘의 복음주의 선교가 맹목적 포교에서 벗어나 선교현지의 물질적 사회적 어려움까지도 돌아보는 “착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는 하나, 그 근본적인 바탕은 아직 예수의 선교와 거리가 멀다. 교회가 선호하는 선교의 모습은 교회의 문을 나서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적절히 거리를 둔 채 오히려 선교를 통해 교회의 틀을 더욱 든든히 다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단기선교를 통해 도전을 받고 교회로 돌아오는 것은 권해도, 정리해고된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힘이 되어줄 생각은 않는다. 그러기에 교회는 헐벗고 불쌍한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눈물을 유도하기는 해도, 대형화된 교회의 풍요한 삶이 그들의 고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고민하지는 말라고 한다. 그러기에 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을 감동스럽게 끌어안으면서도, 자기가 정죄하는 성소수자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미안함도 마음에 품지 않는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은 모순된 우리 신앙의 근본을 뒤집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교회는 그러한 섬김보다는 먼 곳에 선교의 손길을 내미는 것을 선호한다. 그럼으로써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헌신과 연대가 없이도 얼마든지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며 자신을 정당화한다. 이렇게 활용되는 선교는 더 이상 복음의 전파가 아니다. 단지 교회를 위한, 또 하나의 교회의 프로그램일 따름이다.

우리가 섬겨야 할 이들을 찾아 교회 문 밖을 나서는 행위로서의 선교는 교회의 희망이다. 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나눔과 연대로 거듭나기 위한 가능성이 거기에 들어 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선교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벗어나, 예수의 선교, 하나님의 선교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선교가 교회의 프로그램으로 활용되어서는 안된다. 선교가 우리의 신앙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도 안된다. 예수의 선교가 그랬던 것처럼, 가난하고 소외되고 억눌린 이들의 삶과 그들의 이야기가 그 중앙에 놓여야 한다.

선교의 목적

“유럽의 교회들을 가 보면 문 닫은 곳들이 한 두 곳이 아니고 그렇지 않은 곳들은 할머니들만 몇 명씩 앉아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도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것을 막으려면 선교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 30세가 넘어가면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점점 어려워지므로 15세 이하의 청소년들을 잘 교육해야 합니다.”

최근 어느 선교사/목사가 설교하며 한 말을 들었다. 이런 종류의 주장을 처음 듣는 것은 아닌데도 유난히 거슬렸다. 선교의 목적이 교회를 살리기 위한 것이란 말인가? 기독교인의 수를 늘리는 것이 선교라는 생각은 오류 중의 오류다.

사명

선교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온 세계와 민족과 방언을 향해 나아가는 원대한 계획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세계를 향한 우리의 비전을 이야기하며 그 선교의 사명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은 너무나 작은 일들뿐이다.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는 큰 일을 해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고 하는 생각은 사실 얼마나 가소로운가.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 티끌만도 못한 우리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다음 순간 영원 속으로 사라지고 말 존재들이? 사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는데 우리의 도움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사람의 입으로 그 영광을 입증받으실 필요도 없으시다. 단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함께 가자고 손을 내미시며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실 뿐이다.

어쩌면 나의 평생을 통해 내게 맡겨진 사명이란, 언젠가 나를 스쳐지나가게 될 한 사람에게 따뜻한 한 마디의 말을 건네는 것, 그럼으로써 그 사람의 삶 속에 작은 위안을 주고 조용히 사라지는 그런 작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정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이라면, 그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그것을 내게 감당시키셨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영광이 아닐까? 그 일을 마친 뒤 내가 아무런 흔적도 없이 잊혀진다 할지라도, 그 한 순간을 위해 하나님이 창세 전부터 나를 기억하시고 준비시켜 오셨다고 생각한다면, 그보다 큰 은혜가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시는 일에 사소한 일이란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하나님보다 앞서가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때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사명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음이 두기고

사랑하는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내가 지내는 형편과 내가 하고 있는 일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여러분에게 알릴 것입니다. 우리의 사정을 알리고, 또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고, 나는 그를 여러분에게 보냅니다. (엡 6:21-22)

로마에서 갇힌 몸이 된 바울은 두기고를 통해 동역자 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형편과 소식을 알린다. 어찌보면 두기고는 이음이의 전형이다.  사정상 직접 연락하고 교류하기 어려운 선교사와 동역자 사이를 오가며 서로의 사정을 알려주고, 그럼으로써 서로가 기도와 지원으로 하나될 수 있게 해 줄 뿐 아니라, 양쪽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먼 거리의 단절을 넘어서게 해주는 참된 다리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없이도 바울이나 에베소 교회가 그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가 없었다면 바울은 고독과 절망에 젖어버렸을지도 모르고,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고난을 인식하지 못한 채 안일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두기고의 존재는, 갇힌 자 된 바울에게는 담대한 용기를, 그리고 에베소 성도들에게는 뜨거운 도전을 심어줌으로써, 이들 모두가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된 선교팀으로 완성되도록 돕는 중요한 연결고리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선교에 참된 참된 동역과 참된 헌신이 있기 위해서는, 소리없이 그 고리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작은 두기고들이 필요하다.

선교사와 소통하기

자신이 후원하고 있는 선교사와 개인적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선뜻 먼저 선교사에게 연락을 해서 안부를 묻고 소통을 나누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다. 전화나 이메일을 보내고자 해도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고, 연락을 받는 선교사가 부담스럽게 여기거나 귀찮아하지는 않을지, 여러모로 주저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후원자들은 선교사와 직접적으로 연락을 취하기 보다는 그냥 조용히 기도하고 후원하기를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선교사와 후원자 사이의 소통은 물질적인 후원이나 기도만큼이나 중요한 동역의 요소이다. 즉 어색하거나 귀찮다는 이유로 넘겨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후원자와의 개인적인 소통이 있을 때 선교사는 자신이 하나의 사역팀에 속해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되고, 그를 통해 큰 격려와 위로를 받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사역에 있어서 더 책임있는 자세로 임하게 된다. 따라서 후원교회는 물론이고 개인 후원자들도 힘이 닿는대로 선교사와 직접적인 연락을 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선교사의 사역에 큰 기여를 하고 있지 않은 하찮은 후원자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말고, 선교사의 사역팀의 중요한 한 지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당당하게 선교사에게 안부와 격려의 말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렇게 연락을 받는 선교사 또한 그에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응답함으로써 그러한 후원자들의 관심에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자신을 향한 지체들의 열정을 격려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지체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동참하게 이끄는 일은 그 어떤 사역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행군

오늘날의 선교는 장엄한 찬양이 울러퍼지는 가운데 모든 열방과 민족을 향해 전진하는 일사불란한 행군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교회는 선교의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위해 나가 싸울 군사를 “동원”하며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추구하는 전쟁에 나선다. 이렇듯 전쟁의 은유로 가득한 선교의 언어는 그 선교가 정작 담아내야 할 작은 소리들을 뒤덮어 버린다. 선교의 “대상”으로 전락한, 그렇지만 그 나름대로의 삶의 고민과 이야기를 지닌 선교지의 사람들, 선교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끌고 가다가 낙오되고 잊혀지는 선교사들과 헌신자들,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무한경쟁을 의심하고 고민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이 모두의 소리는 하늘을 찌르는 선교의 나팔소리에 비하면 한없이 미약하고 힘없는 작은 소리이다. 작은씨앗은 이러한 작은 소리를 듣기 위해 잠시 우리의 발을 멈추는 운동이다. 작은 소리들을 듣기 위해서는 가슴 뜨거운 흥분과 감동보다는 잠잠한 돌아봄과 귀기울임이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

선교사의 비전? 우리의 비전!

“선교사님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라고 우리는 흔히 묻곤 한다. 그러나 선교사와 후원자가 한 몸을 이루어 일한다고 한다면 선교사와 후원자의 비전은 별개일 수 없다. 선교사와 후원자 어느 쪽도 다른 쪽의 우위에 있지 않은, 참된 동역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면, 선교사와 후원자는 한 비전 아래 함께 움직여 나가야 한다. 혹은, 하나의 비전을 찾아나가기 위해 서로 다른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함께 모아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이 품고 있는 비전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후원자나 후원교회가 마음을 두고 있는 비전을 (후원을 받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선교사가 따라가서는 안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교사가 생각하고 있는 사역의 비전을 후원자들은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선교사의 권위로 그것을 정당화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선교사와 후원자는, 동역하도록 우리를 연결해 주신 하나님의 뜻에 가장 합당한 길은 무엇인지,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꿈과 도전이 무엇인지를 함께 나누는 가운데 한 팀으로서의 비전을 가꾸어 가야 한다. 이렇게 하는 가운데, 선교사와 후원자 모두는 나 자신이 갖고 있던 좁은 선교의 비전을 벗어나 세상을 더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선교의 방향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많은 생각과 소망의 나눔이 우선 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선교팀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선교사와 후원자가 선교에 대한 자신의 이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 일상생활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 등을 지속적으로 나누며,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러한 나눔은 머리인 그리스도가 몸된 선교팀에게 조용히 그 뜻을 계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다.

단기선교

단기선교에 참여해 본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막연히만 생각해오던 선교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인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준비하는 가운데 선교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고, 다른 팀원들과 힘든 경험을 하는 가운데 공동체에 대한 사랑도 더 깊어지고, 선교사 그리고 선교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더 깊은 영적 나눔을 체험하게 되고,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며 헌신을 다짐하게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때때로 “누구누구는 꼭 단기선교에 함께 갔으면 좋겠어. 가면 많이 변화돼서 올텐데”라든가 “한 사람이라도 더 가서 많은 은혜를 받고 돌아옵시다”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만큼 단기선교는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선교프로그램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다. 즉, 성도들에게 뜨거운 은혜를 불어넣어주고 공동체를 더 강하게 일으켜주는 단기선교는, 부흥회나 수련회에 버금가는 교회부흥을 위한 주요 전략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기선교의 긍정적인 역할이 아무리 크다하더라도, 그러한 교회 내적인 유익들이 단기선교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단기선교는, 내가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 교회의 부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단기선교라는 이름을 걸고 있다면, 그러한 프로그램은 근본적으로 선교지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기준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내가 감동받았다 해서 나의 방문이 선교지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를 들어 어떤 선교지들의 경우 대규모의 선교팀이 단기간 머물다 가는 것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일단 큰 규묘의 선교팀을 수용할만한 시설이나 여견이 갖추어져 있지 못한 경우도 있고, 현지 문화나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외부인들이 짧은 기간동안 하고 갈만한 일들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 선교팀과 현지인들 사이의 중간역할을 해야 하는 선교사는 매우 난처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또 선교팀이 밀물처럼 몰려왔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그들의 방문이 현지 지역사회에 남기게 될 영항도 예측하기 어렵다.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이 급작스럽게 찾아와 자신들이 준비한 프로그램들을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풀어 놓은 뒤 급히 떠났을 때, 현지인들은 선교팀과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받을 수도 있고 가치관의 혼란을 겪을 수도 있다.

단기선교에 임하며 우리는 흔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이다”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분명히 맞는 말이다. 그러한 고백이 정말 진심이라면, 유행으로서의 단기선교에 도전하기 앞서서 구체적으로 내가 가고자 하는 선교지와 선교사의 상황을 고려하여 단기선교가 이 경우 정말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 결과 아니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열린 마음으로 단기선교 이외에 다른 선교방법을 고려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단기선교는 철저하게 현지 사회의 유익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단기선교는 수련회도 극기 훈련도 아니다. 내가 은혜를 받는다 해서 그것을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은 목표와 방법의 우선순위를 혼동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