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대해 말하는 것에 유익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며 우리의 불완전하고 부족한 모습을 깨닫게 해 주는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율법을 가리켜,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죄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깊은 자기성찰과 연결이 될 때에만 의미가 있다. 스스로에 대한 회개와 반성과 연결되지 않는 죄에 관한 말들은 남을 정죄하고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하는 폭력으로 쓰일 뿐이다.
예수가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두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기나긴 죄의 목록에 “음욕을 품지 말라”는 새로운 조항을 추가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간음이라는 특정한 죄를 범했는지 않았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 율법의 근본적인 의미를 돌아보며 자기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가 말하고자 한 바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간음하지 않았으니까”라며 스스로 떳떳해 한다면 그것은 율법의 참뜻과 어긋나는 일이다. 더 나아가 어떤 이유로든 간음한 이를 바라보며 도덕적 종교적 우월감을 품는다면 그야말로 성경의 왜곡이라 할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정죄는 이러한 뒤틀린 죄의 관념이 극단까지 치달은 경우다. 많은 이들은 동성애가 죄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죄인들을 멸망에서 구원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과연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고 있는가의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그러한 태도가 얼마나 예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동성애에는 전혀 관심없는 이성애자끼리 모여서 타인의 모습을 죄로 규정하는 행동 속에,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한 끊임없는 성찰과 회개의 모습이 들어설 자리가 있는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한치의 관용도 없이, 집단의 정치적 힘으로 자신의 입장만을 관철시키려는 한국교회의 태도 속에는, 타자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추악함만이 담겨있을 뿐, 하나님과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보는 겸손한 고민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타인의 죄에 집착해서는 결코 구원과 성숙함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은 율법의 의미와도, 예수의 가르침과도, 하나님의 영광과도 무관하다.